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de Mallorca)

‘지중해의 하와이’마요르카 섬의 수도 팔마 데 마요르카의 항구 전경
지중해 꽃향기 속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롤리타 여사에게 마요르카 섬은 안익태 선생의 혼이 살이 있는 땅이며
옛 추억이 고이 간직되어있는 작은 세계였다.
스페인의 동쪽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Mallorca)은 매력과 마력이 넘치는 작은 세계이다. 구름으로 덮힌 높은 산, 바다로 내리꽂는 듯한 절벽, 양탄자를 곱게 깔아놓은 듯한 백사장, 밝은 햇살, 부드러운 바람, 그윽한 꽃향기..... 어떻게 보면 천지 창조 때부터 꿈을 찾는 인간들을 위해 완벽하게 창조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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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의 수도는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마요르카의 야자수’이니 지명에서도 남국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제주도보다 약간 큰 이 섬 에는 1년에 자그마치 1천 만 명 이상이 몰려온다. 1841년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쥬 상드도 파리를 떠나 이곳을 찾았다.
특히 그들이 머물렀던 발데모사 수도원은 연중내내 관광객 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마요르카 섬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가> 의 작곡자 안익태의 안식처로 알려져 있다. 일제치하에서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당시 그가 지니고 있던 여권은 우리나라 여권이 아니라 일본여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그는 바르셀로나의 한 유지의 딸 롤리타와 결혼하고 마요르카로 이주해 왔다. 당시 음악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곳에서 그는 먼저 팔마 데 마요르카 시정부와 지방 유지들을 설득하여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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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마 데 마요르카 외각 해변 지역에 있는 안익태선생 거리에 선 필자 | ||
팔마 중심가에 세워진 안익태 기념비
마요르카에 발을 디딘 한국사람이라면 그의 자취를 한번 찾아보는 것이 의무사항이 아닐까. 나는 다행히도 안익태 선생의 막내딸 레오노르의 도움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었다. 팔마 데 마요르카의 중심 번화가에 세워진 안익태 기념비는 2006년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경기도와 팔마 데 마요르카 시정부가 세운 것으로, 그 옆의 안내판에는 지휘하는 모습과 그의 생애가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로 새겨져 있고 또 <애국가> 악보도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데 지중해의 바람결에 <애국가> 선율이 귓전에 스쳐가는 것만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애국가> 표절시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때 어느 불가리아 음악가가 안익태가 불가리아 민요를 베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니, 세계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음악가가 뭐가 답답해서 남의 나라 민요를 차용했단 말인가?
또 나라 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던 그가, 또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이 국가처럼 사용하던 상황을 분통해 하던 그가 남의 나라 곡조를 차용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명한 곡들 중에도 서로 비슷하게 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또 우리나라 음악계 일각에서는 <애국가>가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않으니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나라의 국가(國歌)는 음악적 완성도를 떠나 국민들을 단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가 더 중요하다. 가령 이탈리아는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을 배출했지만, 정작 이탈리아 국가(國歌)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시대에 이름도 없는 한 젊은 작곡가가 쓴 것이다. 이 곡은 음악적으로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들을 단결시킨다.
그러고 보니 안익태의 친일행적 시비도 생각난다. 그가 일제하에서 만주국창건 축하 음악을 작곡하여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필름이 발견된 것이 빌미가 된 모양 인데, 당시의 연주가 어떤 억압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친일’ 딱지를 붙이려한 것은 편협한 사고에 빠진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도 일장기를 달고 뛰었으니 친일파라고 몰아붙일 것인가? 당시 암울하던 시대에 총 대신 지휘봉 하나로 그가 우리민족에게 자긍심을 불어주었던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광복 된지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흑백논리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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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 철제조각 안내판 옆에 선 안익태 선생의 막내딸 레오노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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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이 우거진 유택 마당에서 생전의 롤리타 여사 | ||
추억이 담긴 언덕 위의 하얀 집
팔마 데 마요르카 외곽 남쪽 해변 지역 에는 <안익태 거리>(Carrer D'Eaktai Ahn)가 있다. 지중해의 파도소리가 들리고 남국의 꽃향기가 그윽한 이곳에는 휴양 호텔과 조용한 주택들이 몰려있다. 레오노르에 의하면 시정부에서 <안익태 거리>를 원래 시내의 중심에 두려고 했으나이미 거리이름들이 이미 포화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한편 안익태 선생 유택은 팔마 데마요르카 서쪽 외곽 바다가 내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진 하얀 이층집이다. 대문을 열고 꽃이 가득한 정원을 지나 집 안에 들어서면 안익태 선생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롤리타 여사는 바르셀로나에 친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1965년 안익태 선생이 서거한 이후 40년 이상을 딸 들과 함께 평생을 이곳에서 홀로 보냈다. 2년 전 이곳에서 만났던 롤리타 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요르카 섬에 왜 계속 남아있었냐고요? 마요르카는 남편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섬이고 또 그의 세계였어요. 그가 떠난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섬 곳곳에는 그의 체취가 느껴진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지요. 이 집도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곳이지요. 나는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거의 2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남편이 정성들여 가꾸던 정원은 내가 가꾸어 왔지요. 자, 이리와서 이 꽃향기를 한번 맡아 보세요.” 꽃향기 속에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회상 하면서 지중해를 바라보던 주름진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롤리타 여사에게 마요르카는 단순한 꿈의 섬이 아니라, 바로 안익태 선생의 혼이 살이 있는 땅이며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고이 간직되어있는 작은 세계였던 것 사는 작년 2월, 94세의 노환으로 평생 잊지 못하던 남편이 있는 저세상을 향하여 영원한 길을 떠나고 말았다.
지중해의 꽃향기 속에서 <애국가> 선율이 귓전에 다시 조용히 스쳐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글·사진_정태남 tainam@tiscali.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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